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(문단 편집) == 경제 == 고대 이집트 문명의 주산업은 당연히 [[농업]]이었다. 애초에 [[나일 강]]이 정기적으로 범람한 덕에 생긴 비옥한 땅 위에 생겨난 문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. 나일 강은 8월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9월에 수위가 최고조에 달했고, 이때는 삼각주 유역이 약 1.5m 정도의 물에 잠겼다. 10월부터 범람한 물이 빠지면 그동안 쌓인 비옥한 퇴적토가 남았다. 이 [[에티오피아 고원]]에서 온 퇴적물들은 엄청나게 비옥했고, 이 퇴적물들이 공짜 천연비료 역할을 한 덕분에 이집트인들은 딱히 비료나 퇴비를 주지 않아도 풍성한 수확이 가능했다. 고대 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인들과 함께 세계 최초로 대규모로 농경을 시작한 민족들 중 하나기도 하다. 이집트인들은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했지만 개중 가장 대표적인 작물은 빵을 만들기 위해 길렀던 [[밀]]과 [[보리]]였다. 그 외에 함께 먹을 [[렌즈콩]]이나 콩류도 많이 길렀다. [[양파]]와 [[마늘]], [[파]], [[무]] 같은 뿌리채소들도 주요 작물이었으며 [[양상추]]나 [[파슬리]] 같은 것들도 재배했다. 기호식품으로는 과일을 키웠는데, 주로 [[포도]]나 [[수박]], [[올리브]], [[사과]], [[석류]] 같은 것들을 길러 팔았다. [[프톨레마이오스 왕조]] 시대 들어서는 [[복숭아]]나 [[배]]가 외부에서 전래되기도 했다. 꼭 먹기 위한 식품만을 기르는 건 아니었다. 이집트인들은 밭에서 수백여 종의 약초들을 길렀는데 대부분이 약용이나 향신료로 팔려나갔다. 의외로 유명한 [[파피루스]]는 기르지 않았다. 굳이 기르지 않아도 야생에서 워낙 많이 자라 쉽게 구할 수 있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. 참고로 파피루스는 굉장히 유용한 식물이었는데, 뿌리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었고 줄기는 종이를 만들거나 배, 밧줄, 집을 만드는 데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. [[아마]]도 길렀는데 주로 이집트인들의 의복 재료인 아마포를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. [[헤나]]는 염료를 만들기 위해 길렀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dn-garden-blog-indoorag-ancient_grande.webp]]}}} || 고대 이집트가 고립된 왕국이었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건 아니었다. 고대 이집트인들은 일단 [[중왕국]] 시대부터 꾸준히 시리아와 저너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도 교역하면서 무역을 진행했다. 주로 [[무화과]]나 [[황금]], [[삼나무]] 등이 주요 수입원이었고 전성기 시절에는 심지어 저멀리 [[아프가니스탄]]에서 [[라피스 라줄리]]를 들여오기도 했다. 광대한 [[사하라 사막]]을 넘어 그 반대편의 부족들과 소규모로 무역을 전개하기도 했다. 사막 중간중간에 있는 [[오아시스]]들에 초소와 숙소를 만든 다음 이를 거점으로 [[카라반]]들을 보냈던 것이다. 주로 사하라 이남의 부족들에게 풍부한 [[상아]]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대메소포타미아 무역, 대지중해 무역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작았다. 이집트가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인 루트들 중 하나가 해상 무역이었다. 이집트인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도 되기 이전부터 배를 만들고 조선술을 익혔는데,[*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75피트 크기의 배가 이집트에서 출토되었다.] 주로 밧줄이나 갈대, 파피루스 따위로 배를 만들고 활발한 해상 무역을 진행했다. 다만 배 자체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근본적 한계로 멀리까진 나가지 못했고 기껏 해봐야 시나이 반도 해안가나 그리스까지가 한계였다. 특히 그리스, [[페니키아]]와 무역을 많이 했다. 태양빛이 지나치게 쨍쨍하고 사막 기후인 이집트 특성상 질 좋은 [[포도]] 생산이 쉽지 않아서 일부러 포도가 특산품인 장소들을 찾아갔던 것이다. [[수에즈 운하]]를 처음으로 착공하려 시도하기도 했다. 역대 파라오들이 대대로 꾸준하게 [[나일 강]]과 [[홍해]]를 잇는 대운하를 만들려 시도했는데, 안타깝게도 고대 기술력으로 성공하기에는 워낙에 거대한 프로젝트라서 성공한 파라오는 없었다. 훗날 [[아케메네스 왕조]]의 [[다리우스 1세]]의 시대에 들어서야 파라오들이 짓다가 실패한 운하를 이어받아 결국 운하 건설에 성공한다. [[헤로도토스]]의 역사에 의하면 [[트리에레스]]들이 서로 노를 펴고 교차 운행이 가능할 정도의 폭이었고 깊이도 꽤나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후 1,000년 간 잘 쓰이다가 [[아바스 왕조]] 시대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막혀버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